사막의 브론토사우르스, 네거리의 보들레르, 몬테비데오의 딸꾹질. 도망갈 채비를 마치고 집을 나서는 순간 어디에서도 만날 수 없다는 생각에 나는 다시 흰 종이 앞에 앉는다. 이곳이라면 주저 않는다 해도 슬프지 않고 슬프지 않다 해서 기쁘지도 않고 기쁘지 않다 해서 주저 않지는 않는다. 2년간 종이의 형태를 고민했고 3년간 종이의 질을 고민했고 4년간 종이의 죽음을 고민했고 1년간 종이의 삶을 고민했다. 종이와 헤어지기 위해 새우버거도 먹어봤고 종이를 붙잡기 위해 백인의 고추도 빨아봤고 종이를 찢기 위해 데이빗 린치의 영화도 봤고 종이를 먹기 위해 치마도 입어봤고 종이를 뱉기 위해 토끼도 키워봤다. 총소리가 울리지 않는 밤새도록 칼을 갈아 아침이면 연필을 깎아 먹고 잠이 든다. 고추가 서지 않는 밤새도록 피를 뽑아 아침이면 만두를 빚어 먹고 잠이 든다. 잠은 오지도 가지도 않고 나는 난지도 넌지도 모르고 지도를 펼치고 딸치고 지치고 나물은 데치고 얼쑤 경찰은 대치고 막치고 정치고 망치고 수치고 숙취고 미치고.
쉬려고 했는데 덜컥 일을 하나 맡아버렸다. 순식간의 일이라 나를 골탕먹이기 위해 여러 사람이 치밀한 계획을 짠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만약 로베르토가 아닌 로베르토, 훌리오, 마세도니오, 호세, 펠리스베르토, 에르네스토, 페르난도, 엘레나, 후안 카를로스, 레이날도를 제외한 다른 작가였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잘하지는 못해도 번역을 좋아하기 때문에 호르헤, 가브리엘, 마리오, 카를로스라해도 아마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작품을 번역하고 싶다. 나는...배수아가 마르틴 발저의 소설을 한 권 번역했다. 독일어를 더 했어야 하는데.
방학 동안 적어도 100페이지는 쓸 수 있겠다 생각했는데 한국어가 말이 아니다. 한국어 레포트 10장 쓰는 시간이랑 되도 않는 스페인어로 10장 쓰는 시간이랑 비슷하다...한국어를 더 했어야 했는데.
1. 연구실에 있는 책과 자료를 일주일에 걸쳐 집으로 옮겨왔다. 일년 반 동안 대학원 수업을 들으며 읽은 양만 해도 엄청나지만 아무 것도 생산해내지 못한 게 사실 더 엄청나다. 커다란 책장을 세 개 정도 구입해야 다 예쁘게 진열해놓을 수 있을텐데 책 사는 돈은 아깝지 않으면서 책 한두 권 값밖에 안 하는 책장 살 돈은 왜 이리 아까운지 모르겠다. 정작 생활에 필요한 돈은 끔찍이 아끼면서 생활에 도움이 안 되는 돈은 끔찍이도 써댄다. 책잡힌 인생이여.
2. 버리기 위해 책을 읽는 기간이 있다. 일정한 양을 넘어서면 생활 공간 확보를 위해 버려도 될 것 같은 책부터 쓱쓱 읽어나간다. 그런 과정을 반복해서 남아있는 책이 이렇게 쌓이는 셈이다. 결국 버리지 않을 책은 읽지 않는다. 만나고 싶은 사람과의 약속을 계속 취소하는 것처럼 말이다. 미래의 책.
3. 시대착오적인 과제를 목표로 설정하기 때문에 실패가 반복된다. 나의 실패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아직 실패해보지 못한 것도 꽤 많다. '작가의 실패'라는 단어를 보며 입맛을 다시는 이유다.
4. 마지막 레포트의 마지막 문장에 '자유'라는 단어를 쓰면서 내가 이렇게 무뎌졌구나 생각했다. 어리석게도 쉼표를 열고 '일시적인 환상일지라도'라고 덧붙였다. 내가 이렇게 무너졌구나.
1. 처절할 정도로 의미 없는 두 개의 레포트를 쓰기 위해 2주 동안 거의 아무 것도 하고 있지 않다. 충동적이면서 동시에 합리적인 결론은 '쓰지 않는다'(배째!)겠지만 이미 그런 결론을 차단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돌아갈 수는 없다. 그렇다면 왜 바보같은 짓을 하고 있는가? 이것은 지난 2년 동안 거의 아무 것도 하지 않았던 데 대한 형벌이자 속죄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러한 과장된 해석의 가장 우스꽝스러운 점은 2년을 2주로 대체할 수 있다는 얍삽함일 것이다. 항상 경탄해 마지 않는 기독교적인 얍삽함. <신곡>을 읽는 동안에는 기독교인이 되어야 한다고들 하지.
2. 영화를 통해 조금씩 기운을 내는 중이다. 어떤 면에서는 2001년이 오버랩되는 상황인데 그때는 모든 것(이 과장은 과장이 아니다)을 배째고 비디오방에서 지하생활자의 관람기를 작성했다. 미래가 없을 때니 너무나 쉽게 곧 모든 비디오를 다 볼 수 있을 거라 믿었는데...도서관과 비디오방은 허영심의 큐피드다. 영화에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으니(대학에 오기 전까지 나를 포함한 우리 가족은 항상 동생이 빌려오는 비디오만 봤다. 아직도 <취권2>를 보고 아뵤 아뵤 잠꼬대를 하던 동생 모습이 눈에 선하다) 무엇을 보아야 할지 감이 없었다. 닥치는 대로 보다 우연히 알게 된 책이 <영화에 대하여 알고 싶은 두 세 가지 것들>(구회영)이었고 다행히 왠만한 비디오는 다 구비한 비디오방이어서 <리포맨>, <토마토공격대>, <수잔을 찾아서> 등 다른 곳에서는 구하기 힘든 비디오도 볼 수 있었다. 오늘 다시 그 책을 빌렸다. 이렇게 의식적으로 과거를 중첩시키는 행동은 삼류 멜로드라마적이지만 어쨌든 제의는 허접해도 제의다. 시간을 열어주는 타자의 폭력이 없다면 나는 내가 아는 시간을 이용해 결국엔 동아리줄마냥 툭 끊어지더라도 매듭을 만들 수밖에 없다. 삼십줄에 접어드는데 인생이 간지가 안 나네.
3. 작년에 시네마테크에서 멜빌의 <형사>를 보고 집에 와 두기봉 <방축>까지 다시 보며 간지의 향연을 만끽했는데 그제 본 멜빌 <사무라이>는 만끽을 넘어 자지라질 정도다. 내용을 떠나 언어 때문에 자지러지는 깔데론의 <인생은 꿈>을 연상하게 되는 것도 뜬금없지는 않다. 물론 <신곡>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고. 잠시 멈춰 자지라지는 텍스트와 이미지를 머리 속에 떠올려보니 어질어질하다. 그나저나 오손 웰즈가 <모비딕>을 영화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고 처음 든 생각은 웰즈가 그럼 고래 역할인가...
4. 참 간지 안 나네. 애견미용사 자격증을 따 무슨 일을 하세요 물을 때 '개털 깎습니다' 이러면 정말 간지날텐데.
1. 바람이 가끔은 속삭일 때가 있다. 귀가 안 좋은 나는 나뭇잎이 시위하듯 손을 흔들면 그제서야 바람의 소리를 듣는다. 녀석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일 때는 기억을 멈추고 열심히 들어야 한다. 열심히 듣지 않으면 곧 속썩일 일이 생긴다. 오늘이 학교에 오는 마지막 날이구나. 대학원 시험을 치르던 날 자하연을 감싼 나뭇잎 사이로 나는 그렇게 속삭였고 장례를 치르듯 죽은 문장을 종이에 써내려갔다. 어떻게 죽었는데 살았다고 착각할 수 있었을까. 바람은 가끔 속삭이는데 나는 그것마저 제대로 듣지 못한다. 콘크리트에 익숙한 발바닥은 흙의 감촉에 너무 쉽게 지쳐버리고 어느새 성경에는 창조주께서 시멘트를 빚어 인간을 창조하신다. 죽음은 예언으로 찾아오지만 돈 후안은 어쩔 수 없다. Tan largo me lo fiais. 오늘은 이것이 게으른 인간의 자기변명이라 해석하자.
2. 돈키호테로 사는 순간이 있다. 나는 착각했다. 아니다. 돈키호테는 가장 외로운 인간이다. 사람들이 너를 돈키호테라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너는 가장 외로운 인간이 된다. 그들이 너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너는 그들에게 가 죽음이 되었다.
3. 나를 신이라 생각하는 것도 과장. 나를 벌레라 생각하는 것도 과장. 하지만 나를 인간이라 생각하는 것도 과장은 아닐까. 과장하지 않고 쓸 수 있을까.
4. 나의 이십대를 칼같이 정리하셨다. 십년 동안 계속 칼을 갈다. 십년 뒤 이제는 싸워야겠다 칼을 뽑다. 너무 갈아서 칼이 사라지고 없다.
5. 어쩌겠어. 칼이 없으면 칼집으로라도 싸워야지. 있어?



